도움이 되는 이야기

귀거래사(歸去來辭)/도연명

남전 2012. 3. 21. 20:23

歸去來辭(귀거래사) 

                           陶淵明(도연명), 임영봉(林永奉)譯

 

자,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

고향 논밭에는 잡풀이 무성한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내 스스로 고귀한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가두었으나

어찌 원망하고, 나를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후회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앞으로는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도 깨달았는데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리 오지 않았으니

이제는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았느니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치는 것을

사람들에게 고향이 여기서 얼마나 멀지? 하고 묻다 보니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것을

마침내, 저 멀리 우리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나는

머슴아이들 길거리까지 나와 나를 반기고

어린 것들이 사립문에서 손 흔들며 나를 맞는다.

마당 안에 있는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

어린아이 손을 잡고 방에 들어오니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술항아리 끌어당겨 내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니

뜨락 나뭇가지 바라보면 웃음이 한 말 가득

남쪽 창가에 기대어 그저 의기양양하니,

무릎 하나 들여놓을 오두막집이지만 이 얼마나 좋은가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사람 없어 항상 닫혀 있네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흐르는 대로 쉬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개를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아는데

서산에 해는 지고 저녁빛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자,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는 단절된 생활을 하겠느니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느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동기간 친척들과 살가운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내일은 서쪽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은 골짜기 맑은 시냇물을 찾아가고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로 푸르고

샘물은 졸졸 솟아 흐릅디다려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날 참이로구나!

 

이 몸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이제 새삼스레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내겠는가

돈도 벼슬도 내 원하는 것이 아니니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하리

동쪽 언덕에 올라서는 조용히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물을 바라보며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노니

아흐,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原文)

歸去來辭/陶淵明

 

歸去來兮         귀거래혜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乃瞻衡宇         내첨형우

載欣載奔         재흔재분

僮僕歡迎         동복환영

稚子候門         치자후문

三徑就荒         삼경취황

松菊猶存         송국유존

携幼入室         휴유입실

有酒盈樽         유주영준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歸去來兮          귀거래혜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或命巾車         혹명건차

或棹孤舟         혹도고주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已矣乎            이의호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도연명 [Tao Yenming, 陶淵明 : 중국의 대표적 시인.

(병) Tao Yenming (웨) Tao Yenming. 365~ 427.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

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

(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

(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

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

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

(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

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

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

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

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 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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