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되는 이야기

부처님께서 밝히신 진리와 동식물의 생명, 그리고 살생의 문제

남전 2012. 3. 5. 12:57

(모셔온 글)부처님께서 밝히신 진리와 동식물의 생명, 그리고 살생의 문제

 

싯달다太子의 出家

 

고타마 싯달다太子께서는 궁중에서 궂은일이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사시다가 父王을 수행하여 農耕祭에

갔다가 노역에 찌든 농부와 파헤쳐진 흙에 드러난 벌레들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성밖으로 나들이를 나갔다가 東門밖에서 백발노인을, 南門밖에서 병자를, 西門밖에서 죽은 자를,

바꾸어 말하면 삶과 죽음, 고통의 현장들을 보시고 또 한번 크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北門밖에서는

出家沙門을 만나 生死와 苦의 문제를 풀 求道의 길이 있음을 알고 出家를 결심하게 됩니다.

 

1) 사문유관상; Daum 카페>천불사 무영〉경전 다가가기〉부처님의 생애〉사문출유 글번호 48

2) 사문유관; Daum 카페>직장불교〉불교공부〉부처님의 출가> (3) 출가의 동기 글번호 2362

 

緣起法

 

싯달다太子가 雪山에서의 六年苦行끝에 생각을 고쳐 다시 宇宙森羅萬象의 實相을 觀照하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달으신 바가 바로 緣起法 입니다.

緣起란 因緣生起의 줄임말인데 宇宙萬有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眞理로서 이를 벗어난 存在나 現象은

없습니다. 緣起란 모든 存在나 現象은 原因과 條件이 어우러질 때 (因緣和合) 생겨나고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消滅된다는 것입니다.

 

森羅萬象의 生滅에 낱낱이 미치는 이 眞理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證得하지 못하면 衆生이고 이를 깨우

치면 佛陀(覺者)인 것입니다. 싯달다太子께서 바로 그것을 깨우치셔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如來十號중에는 正遍知(우주삼라만상의 實體를 빠짐없이 다 아시는 분), 世間解(세간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別號가 있습니다.

이 眞理는 釋迦世尊의 見解나 創作이 아닙니다.

世尊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如來가 世上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法은 常住요, 法住요, 法界

이니라. 如來는 다만 이 法을 自覺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衆生들에게 설하나니 .....』〈雜阿含經 권12〉

佛敎를 깨달음의 宗敎라고 하는 것도 이런 緣由에서입니다.

 

釋迦世尊께서는 연기법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此有故彼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生故彼生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此滅故彼滅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雜阿含經 제30권〉

 

모든 存在와 現象은 서로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라만상이 어느

하나 獨立的일 수가 없이 相互依存關系와 相關關係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相依相關).

그러니까 모든 것은 고정적일 수가 없고 변하게 마련이며 生滅 역시 현상이 변하는 것일 뿐 일회로 끝을

맺는 것(佛敎에서는 斷滅相이라고 함)이 아닌 것입니다.

인과 조건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나 조건들이 되어 交互流轉되어 갑니다.

마치 그물(網)의 코가 이어져가듯이. 이를 因果의 流轉相續이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緣起法은 佛敎의 生命觀이며 宇宙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緣起法은 佛敎의 始發點이며 論理的 基礎입니다. 衆生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라는 말씀은 存在와 現象의 空間的 풀이이며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말씀은 生滅의 時間的

관계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佛敎의 時間觀과 空間觀

 

여기서 잠시 時間과 空間이 무엇인지 집고 넘어가야 될 듯 합니다. 人間은 시간의 線形 連續性과 공간의

幾何學的 三次元構成을 想定해 놓고 그 지배 하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과거현재미래를 구분하는 時點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三次元의 始原이라 할 點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편의상 지어낸 約束일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측정의 基準點도 있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置換되기도 하므로(量子力學에서도 비슷한 이론을 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測定可能한 시간이나 공간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槪念設定은 虛構일 수밖에 없고 事物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선택적인 執着의 强度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義湘祖師 法性偈에 다음과 같은 귀절들이 있습니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에 모두 있고 많은 데도 하나 있어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바로 모두요 많은 것 또한 하나이니

一微塵中含十方     한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가득하네

無量遠劫卽一念     한량없는 긴세월이 바로 한생각

一念卽是無量劫     한생각이 또한 바로 한없는 세월

〈淸華큰스님 번역〉

 

十二緣起說

 

다시 연기법으로 돌아가지요. 당초 중생들의 生死, 憂悲苦惱의 실상을 규명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출가하셨던 釋迦牟尼께서는 宇宙를 總御, 總轄하는 연기법을 깨달으시고 이를 衆生界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十二緣起說입니다.

老死,憂悲苦惱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남은 어떤 존재()가 있어서이다.

그 존재는 집착이 모인 덩어리()이다.

집착은 애욕() 때문에 생긴다.

애욕은 받아들임() 에 의해 일어난다.

받아들임은 접촉()에 의한 것이다.

접촉은 6가지의 감각기관(六入)에 의해서이다.

감각기관은 육체와 정신 (名色)이 있기 때문이다.

명색은 의식()에 의해서 생긴다.

의식은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 의지는 어리석음(無明) 때문에 생긴 것이다.〈雜阿含經 제12권〉

 

이는 생사와 고가 생기는 과정을 밝히신 것으로 順觀 또는 流轉緣起, 流轉門이라고 하며 바로 중생의 길

입니다. 이와 반대로 유전의 흐름을 거슬러 無明을 없애는 데서부터 生老病死가 없는 데로 가는 과정을

觀 또는 還滅緣起, 還滅門이라고 하며 깨달음의 길입니다.

중생의 잣대로 보면 무명→행까지는 과거의 因을, 識→有까지는 현재의 삶을, 生→老死는 미래의 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緣起法, 十二緣起說의 流轉門, 佛敎의 時 ․ 空間觀은 因果應報와 輪回說로 이어지게 됩니다.

 

1)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움직이는가?

    연기법; 대한불교조계종〉신도교육신행〉불교란무엇인가〉첫 걸음〉불교의 이해

2) 연기법; Daum신지식〉Q&A〉완료된 질문〉불교-존재의 법칙

3) 석가여래 붓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법 이해; Daum카페〉한신정사〉불교초심자 기초교리〉불교

   핵심교리 이해

4) 인과와 연기법; YAHOO블로그〉붓다선원〉이반불교자료실

 

因果應報와 業

緣起法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無生物界의 인과의 흐름과는 달리 훨씬 복잡한 양태를 띕니다.

인간의 행위는 意識에서 비롯한 意志作用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因의 구성에 의지가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인간의 의지가 담긴 原因行爲를 業이라고 하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는 報라고 하여 큰 틀에서는 因果法

을 벗어나지 않으나 자연계의 因果와 구별해서 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因果應報, 業報라는 말을 씁니다.

불교의 唯識思想에서는 이를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意識에는 眼耳鼻舌身의 前五識과 意根의 認識活動인 第六識이 있는데 이들의 작용은 항상 변하며 그

밑바닥에는 無明과 我見을 담은 潛在意識인 第七末那識이 있다고 봅니다.

달리 自我意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제7식에서 발동되어 身口意로 지은 업과 과거로부터의 薰習들이

일종의 에너지와 같은 業力이 되어 第八阿賴耶識에 저장된다고 합니다. 世尊께서는 漢譯으로 無沒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第八識을 곧 種子識이며 종자식이 바로 마음(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愣伽經〉

이 業力이 기회가 닿으면 報로 나타나게 되는데 어떤 fact나 fact들이 program화되어 압축 저장되었다가

Hardware에 걸어져 system이 작동되면 그 program이 그 이후의 구성과 진행을 결정하는 것과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業이 일단 결정되고 나면 스스로 소멸되는 일이 없이 반드시 果報를 낳게 마련입니다.

法句經에서는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속의 동굴에도 사람이 惡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業은 개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므로 자기가 지은 업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

거나 다른 이가 보를 대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自作自受, 自業自得의 원리라고도 합니다.

 

1) 업과 윤회; Daum 블로그> 어둠을 헤치고(선광)> 기초교리>9-1

2) 유식사상의 성립과 전파; Daum 블로그> 어둠을 헤치고(선광)> 유식사상>1

3) 유식사상; Daum 카페> 부쳐마을> 티벳트불교 글번호 5,6,7,8

 

輪廻

佛敎의 時 ․ 空間觀에서는 時空이 圓融無碍해서 어디에도 境界를 그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宇宙萬有의

존재는 변화자체가 실상이어서 개개의 변화를 槪念化하는 것은 虛像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眞理이고 이것이 釋迦牟尼께서 깨달으신 바입니다.

弟도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진리를 體得하고 證得하지 못했기 때문에 衆生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

이지요. 중생의 안목은 시야가 좁고 장애가 끼어 있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그 실상을 깨닫는

길로 인도하려는 世尊의 大慈大悲가 八萬四千의 法文을 펴시게 한 것입니다.

世尊의 가르침에서는 衆生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地水火風이란 非實體的인 요소들이 어떤 조건들에

의해서 一時的으로 모여 있는 集合體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我)”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죽으면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면 또 죽어 다음 세상에 또 태어나서 수레바퀴 돌듯이

끝없이 돌고 돈다고 합니다. 이를 輪回라고 하지요. 여기서, 그러면 「나고 죽고 도는 主體는 무엇이냐?」

문제가 제기됩니다. 무엇이 윤회하는 것이냐는 것이지요. 佛陀의 가르침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固定不變의 實體는 없으며 따라서 어떤 존재가 변화하는데 主體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佛陀께서는 雜阿含經의 第一空經에서 『윤회란 고정불변한 어떤 주체가 한 生에서 다른 生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고 존재 그 자체가 변하면서 계속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業이 그 존재 속에 業力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전술의 第八阿賴耶識)그 존재가 생을 다하면 다음 생

 을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미란다王問經에서 나가세나尊者는 윤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 현재의 명칭과 형태

의해 善 또는 惡의 행위를 짓고 그 행위(업)에 의해 다른 새로운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

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악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가세나尊者는 여기에 망고열매의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이 망고열매를 훔친 사람을 잡아 왕에게 고발했는데 그 망고도둑 말하기를 「내가 딴 열매는

이 사람이 망고열매를 심어서 길렀기 때문에 자기 나무라고 주장하는 나무가 된 그 열매와는 다른 열매

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밀란다王은 「그 도둑이 훔친 망고열매는 망고나무의 임자가 심은 열매와는 다르지만 그 열매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 밖에도 윤회에 관한 비유에는 牛乳가 →酪→生소→熟소→醍醐로 변하는 예와 나비의 알이→벌레→

번데기→나비로 변태하는 예들이 있습니다. 牛乳와 醍醐 사이에는 同一性이 없으나 不可分의 관계가 있

으며 나비의 알과 성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윤회에는 영혼이나 아트만이라고 하는 등의 어떤 주체

가 있어서 轉傳相續하는 것이 아니라 業力이 다음 생의 존재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善因善果 惡因惡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들은 業의 값(불교의 유리관에 입각한)에 따라 欲界 色界

無色界의 三界(세 가지 세계), 또는 地獄 餓鬼 畜生 阿修羅 人間 天上의 六道(여섯 가지 세계)를 윤회한다

고 합니다. 따라서 한 존재의 業力이 남아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되며 業力이 消盡되면 윤회는 끝나게 됩니다.

그런 경지를 解脫 또는 涅槃이라고 합니다.

육식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에스키모인들은 어찌 설명할 것이냐는 문제는 惡因惡果의 법칙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죄를 지을 기회마저 없었던 많은 영아들이 영양실조로 죽

어가고 있습니다. 먹거리가 지천인 곳에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는데...... 육식의 문제를 질문 받은 달라이

라마께서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는 경우라도 고기를 제공하고 죽어간 중생들이 좋은 세상

에 태어나도록 축원해 주어야 된다』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1) 밀란다王問經

2) 윤회란 무엇인가?; Daum카페>석가모니불>법공양의 글>글번호 940

3) 윤회; Daum카페>불교사랑(청용사)>근본불교>윤회와 업>글번호 4

4) 윤회의 주체문제; Daum카페>불교사랑(청용사)>근본불교>윤회와 업>글번호 7

5) 업과 윤회; Daum블로그>어둠을 헤치고(선관)>기초교리>글번호 9-1

 

“동물은 죽이면 안 된다며 같은 생물인데 식물은 죽여도 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 가운데에도 장님도 있고 귀머거리, 벙어리도 있으며, 팔이나 다리가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은 이는 없지만 모두 無始이래 상속되어온 業에 의해서 이루어진 報,

즉 業報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論理가 성립됩니다. 동물의 경우 각기 敏鈍의 차이와 일부의 결여 여부가 있으나 前五識

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가 色盲이라든가, 洞窟새우는 視覺이 없다든가, 또는 물고기의 눈에는 인간이 直線

으로 보는 것이 휘어져 보인다는 것들이 그런 예에 듭니다만 인간의 五感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動物의 第六識은 思考 보다는 反射意識이 자리하고 第七識은 本能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식에 바탕을 둔 행위도 업을 짓게 됩니다. 동물의 경우도 第八識이 種子識과 藏識으로서의

역할은 다한다고 보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죽이는 것은 惡業을 짓는 일이 되고 당하는 쪽에서는

억울함과 원한과 복수심을 품게 되어 그것들이 각 당사자들의 藏識에 저장되어 기회가 되면 業報로 나타

나게 됩니다. 동물과 동물들 사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弱肉强食」의 문제는 위와 같은 脈絡을 바탕으로

類推할 수 있습니다.

 

植物의 경우에는 前五識의 대부분이 缺如되어 있고 한두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나마 아주 낮은 차원이며

第六識과 第七識은 種族繁殖의 program 정도만 있으며 第八識에는 그 program과 살아 있는 동안의 과정이

첨가되어 蓄積 貯藏되어 있을 뿐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따라서 동물의 第七識과 같은 自意識이 없고 生存

program만 있기 때문에 業을 짓지도 안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에 危害를 가하는 쪽에서도 三毒(貪嗔痴)의

因만 없다면 업을 짓지도 않는다고 보아야 됩니다.

식물을 죽이는 일은 業報와 무관하기 때문에 괜찮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하겠지요. 업보와의 연결이

없기 때문에 동물이 植物界로, 식물이 動物界로 윤희하지도 않습니다. 한편 식물은 환경의 일부이므로

환경파괴의 수준까지 식물을 죽이는 일은 동물들의 생존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 됩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어찌하여 제1식부터 제8식까지 그런 차이가 있느냐?, 또 식물은 왜 그렇게 생겼

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돌멩이에는 왜 생명이 없느냐고 반문하면 어찌 대답하겠습니까?

모두가 우주만유를 總御 ․ 總轄하는 緣起法이 해답입니다.

 

人類의 進化와 먹거리

佛敎의 緣起法은 進化論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화론이 연기법의 實證的 理論이라고 보아도

잘못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人類의 진화과정에서 먹거리와 관련된 부분을 언급하며 兄은 인류가 오래 동안 肉食을 해왔지 않느냐는

論旨를 편 것으로 이해합니다. 兄의 논지는 인류의 선조들이 처음부터 육식을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인류의 선조들이 초식동물이었기 보다는 육식동물에 가까웠지

않았겠느냐고 추측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의 발상지라고 하는 아프리카에서 수상생활을 하던 hominid가 기후가 바뀌면서 먹거리가 달라지니까

사반나지대의 지상으로 내려와서 처음으로 다른 동물의 고기를 접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초기에는 다른 동물의 시체나 다른 동물들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 등을 주워 먹었고 뼈를 깨어 골수

를 먹기 위한 목적에서부터 石器가 발달했다고 읽었습니다.

인류의 조상들이 당초에는 草食만 했었다는 것이 거의 定說로 굳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와 침팬지의

고동조상이 약2천만 년 전에 나타났다니까, 인류의 조상으로 보는 Australophidecus가 나타난 4 ․ 5백만년

전으로부터의 시간이 길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요. 現生人類들도 해부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草食動物 쪽

이라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아래에 든 글들이 인류의 진화와 먹거리에 관해 비교적 간단 명료하게 정리한 것 같습니다.

 

1) 우리의 조상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Daum카페>한국채식연합>채식 영문/번역문 글번호 343

2) 초기인류는 채식주의자였을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글번호 341

3) 먹는 것의 해부학적 비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글번호 298

 

後記

兄의 덕분에 弟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兄의 질의에 대해 열심히 答信을 마련했으나 弟 스스로 보기에도 부족한 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弟의 글에서 佛祖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점들이 있다면 모두 전적으로 弟가 과보를 받아야 될 일입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잘못이 있는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人間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문제는 弟가 見性하기 전에는 풀 수 없는 난제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을 살생하는 일 vs 식물을 죽이는 일」의 문제는 심히 어려운 문제여서인지 internet에서도

딱이 그에 초점을 맞춘 글을 찾지 못했습니다. 몇 곳에 질의서를 내놓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拙稿의 글은 弟의 소견입니다. 특히 善知識의 점검을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佛子들이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를 담은 四弘誓願이 있습니다. 인간 모두가 菜食主義者가 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兄의 견해에 대해서는 위에 든 사홍서원 가운데 첫 번째인 衆生無邊誓願度(중생이

가이 없더라도 맹서코 건지리다)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小題目별 단원말미에 摘示한 글들은 弟가 참조한 많은 글들 가운데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인데, 다시

찾아 들어가려고 했더니 잘 안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표제이름으로 통합검색을 통해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장황한 졸고를 읽어 주어 고맙습니다.